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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한 북한 건물 그리고 국경 두만강 전설
[연재 6] 도문과 '조선-중국' 국경지대 두만강
 
김철관 기자 기사입력  2017/08/05 [11:36]
▲ 두만강 부두 선착장이다 선착장 뒤로 보이는 곳이 북한이다.     © 기자뉴스


이도백하에서 두만강으로 가는 도중 도로표지판에 연길까지 183km, 장춘까지는 505km로 표시돼 있었다. 중국 정부의 화장 권유에도 가끔 산중턱에 묘와 묘비가 보였다. 2시간 정도 이동을 했을까. 이전 연길에서 이도백화로 이동 중 들렸던 중간기착지인 휴게소에 다시 들려 화장실을 갔다. 화장실은 문이 없는 전통 화장실이었다. 소변은 횡렬로서 그런대로 해결할 수 있지만 대변은 문이 없어 이곳을 들린 관광객들이 꺼리는 눈치였다. 이곳 휴게소에서 또다시 아이스크림(하드)과 구운 옥수수를 사 요기를 했다. 이곳 휴게소에서도 농심의 장백산 백산수 광고가 눈을 자극했다.

 

버스가 룡정을 통과하니 화룡과 연길로 나눠졌다. 버스는 연길을 선택해 향했고 새로 건설한 깨끗한 포장도로에서 싱싱 달렸다. 이도백화에서 두만강까지는 4시간 20여분 정도가 소요됐다.

 

버스에서 내려 도문(두만강) 국경지대 광장에 들어서자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일광산 산림 공원 관광 코스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고, 일광산 등산로, 일광거리, 알뜰거리, 도룡 통현 도로 등을 자세히 알리고 있었다. 도문에 있는 일광산은 두만강을 끼고 있고 건너편 북한(조선)은 남양시가 위치해 있다.

 

▲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     © 기자뉴스

 

특히 두만강 광장에는 생명의 강, 희망의 강 중국 두만강 문화관광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두만강 건너편 북쪽을 보니 큰 나무가 없는 민둥산같이 보였고, 과거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벌목을 했으나 지난 92년부터 인민들의 탈북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를 자르고 있다고.

 

두만강 변에는 중국 국기와 북한 국기가 전시돼 있다. 중국 오성기 옆에는 도문이라고 새겨 있고, 북한 인공기 옆에는 남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관광객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건너편 북측을 보니 허름한 여러 건물들이 보였고, 카메라 줌을 당기니 붉은 글씨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진도 나란히 목격할 수 있었다. 북측 두만강 변에는 포크레리가 장마로 흐드러진 강변을 정비한 모습도 보였다.

 

▲ 북한의 건물과 산     © 기자뉴스
▲ 북한의 산과 건물     © 기자뉴스
▲ 중국 도문시와 북한 남양시를 잇는 국경 다리이다.     © 기자뉴스

 

두만강 강변 계단 표지판에 도문정신이 새겨졌다. 례의 숭상, 개방 포용, 착실 혁신 등이 도문정신이었다. 이외에도 계단 표지판에 아리랑, 눈물 젖은 두만강, 두만강의 전설, 두만강과 해양진출 등이 새겨져 있다.

 

두만강 전설에 의하면 옥황상제가 백두산 천지물을 몹시 좋아해 그곳을 천부의 물로 정하고 백룡신보다 지키게 했다. 하루는 백룡신이 옥항상제가 하사한 보물병에 천지물을 가득 담고 산 아래로 내려가 놀고 있던 중 보물병이 그만 미끄러져 떨어졌고, 병 안에 있는 천지물이 산세를 따라 흘러들어가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형성됐다. 백두산 천지는 옛적에 두만박이라 불렀고,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 등 세 갈래의 발원이었다. 세 갈래 강물 중 두만강이 바다와 제일 가깝다고 해 백두산 천지의 적자로 불렀다.

 

조선족 민간 전설 중 두만강에 대한 또 다른 견해가 있다. 발원한 곳에서 한 구간의 물줄기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고 해 조선어에서 두만은 도망과 음이 비슷해 도망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아리랑은 조선족의 유명한 민요이고, 아리랑의 의미는 나의 낭군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고려시기의 사랑이야기에서 발원했다. 한 쌍의 금슬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아내의 험담을 듣고 집을 나갔고 남편을 만류하기 위해 아내는 뒤에서 따라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내용이 바로 나의 낭군즉 아리랑이었다. 일본통치 시기 조선 사람들은 아리랑을 구호로 봉기를 했고, 이 때문에 아리랑이 널리 불러져 지금은 이미 조선민요의 대표적인 고전 가요가 됐다. 오랜 세월 부동의 형식으로 아리랑을 탄생시켰는데, 그중 본조아리랑, 신조아리랑,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등 12가지 아리랑이 제일 대표성이 있고, 가장 많이 불리 우는 것은 본조아리랑이다.

 

두만강과 중국의 해양진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86중로훈춘동쪽국경조약에서 중국국기를 단 선박이 두만강을 지나 일본해에 진입하는 것을 러시아가 막을 수 없다고 규정했다. 1964년 중국은 북한 측에 두만강 해양 진출 문제를 협의했고, 북한은 중국 선박이 두만강 하류를 통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 기념사진을 촬영한 구역에는 있는 중국의 오성기와 북한의 인공기이다. 뒤로 보이는 곳이 북한의 남양시이다.     © 기자뉴스

 

1990528일 길림성에서 두만강 하류를 통과하는데 과학고찰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1991중소동쪽구역변경협의에서는 중국 국기를 단 선박이 두만강 하류에서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다고 정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 측은 중국과 소련이 정한 일체의 유효 협의를 존중한다고 표시했다. 199163일 중국은 제2차 두만강 바다진입 고찰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52년 동안 중단됐던 두만강 해양진출권을 행사했다.

 

두만강 관광부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 현수막의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두만강 강우에서 활동하거나 조선측에 소리치거나 물건을 던지는 것을 엄금한다

 

선착장에서 티켓을 사 붉은 구명조끼를 입고 20여분 조각배(모터 달린)를 타면서 북한 쪽을 바라봤다. 북한 인민으로 보이는 한 남자빨래를 하는 모습도 보였고, 이 모습을 촬영하고 있을 때 보트를 운전한 중국 한족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와 촬영을 멈췄다. 줌 달린 카메라로 본 허름한 회색 벽돌 건물에 붉은 글씨 그리고 걸린 두 초상, 적막함마저 느껴지는 북한 남양시의 한적한 시골마을이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반대 방향 도만 쪽을 보니 현대식으로 디자인된 거축구조물과 환하게 웃으면서 고기를 낚은 낚시꾼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었다.

 

보트에서 내려 두만강 광장 쪽을 향해 걸었다. 광장 공원에서는 할머니들이 오순도순 얘기를 나눴고, 자전거를 탄 천진난만한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잘 디자인된 커피숍은 한글로 설렘 눈꽃빙수홍보 배너가 세워져 있었고, 안을 들여다보니 한국 커피숍에 못지않은 깔끔한 디자인이 돋보였다.

 

▲ 두만강 공원 주면에 잘 디자인된 커피숍이다.     © 기자뉴스

 

두만강 광장 주변에는 도문시관광국당원봉사 시범부서에서 운영하는 도문관광복무센터가 있었고, 도문관광서비스센터, 중국조선족무형문화유산 전람관, 소년궁, 아동놀이광장, 두만강 극장, 청소년환경체험관 등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 공원에서 북녘 땅 쪽 두만강을 보며 잠시 시 한편을 습작했다.

 

국경이

 

노 젖는 뱃사공은 어디 있나

모터 달린 조각배에 몸을 싣고

 

남루하고 허름한 벽돌집 벽면의 걸린 두 초상과 붉은 글씨

디자인된 주택단지와 뛰어 놀던 공원의 동네 아이들

그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두만강 국경이라네

 

고구려·발해가 지배한 옛 땅이 두 동강이 났구나

남북통일이 되어도 여전히 국경이라고 부르겠지

하늘나라 고구려 광개토왕 장수왕은 뭐하오

말 달리고 활 쏘던 선구자들은 어디갔나

 

▲ 두만강 부두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있는 관광객들이다.     © 기자뉴스

 

뭔가 아쉬움을 달래며 공원을 가로질러 버스가 정차된 곳으로 향했다. 주변에 꽃길이 조성되어 있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공원 주차장에서 버스에 올라 연길로 가는 도중 도문의 탈북자 수용시설도 보였다. 수용소를 보자 마음이 울컥했다. 한중 수교이후 이곳은 탈북자들이 많아졌다. 수용시설은 탈북자들이 잠시 머문 곳으로 북한과 중국의 협정에 의해 탈북자들을 이곳에서 북한으로 보내고 있다. 도문에도 인민병원, 중강대약방, 만통운전학원, 중의원 등 한글 간판이 주로 보였다. 북한과의 압록강 국경지대가 단동이라면 두만강 국경지대는 도문(圖們)인 셈이었다.

 

오후 5시경 버스에 몸을 싣고 도문에서 연길로 출발했다. 40여 분이 걸렸다. 백두산을 자랑하고 있는 이도백하가 관광도시라면 연길은 농산물 도시였다. 북 연길 게이트를 통과하자 곧바로 신도시 대형 아파트를 짓는 건설현장이 보였다. 서울 강남 같은 큰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었다.

 

▲ 버스에서 본 북 연길이다. 서울 강남같이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는 신도시이다.     © 기자뉴스

 

연길에 도착해 잡화점인 연변산 일모작 농업마트에 들렀다. 북한산 들쭉술, 중국술, 송홧가루, 거울, 모기버섯, 백두산 등산 손수건, 벌꿀, , 깨 등이 진열돼 있었다. 마트 바로 앞에는 야외 포장마치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저녁식사를 하는 이곳 주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방성웅담분판매처라는 간판도 크게 보였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니 공터에서 남녀노소가 함께 어우러져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 연길뿐만 아니라 이도백화 호텔 공원 등에서도 여러 차례 춤을 추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침이나 저녁 일정 시간을 정해 스스로 모여 춤을 춘다고 가이드가 귀띔했다. 이곳의 문화로 자리 잡은 듯했다. 이런 춤 문화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트를 둘러보고 이후 저녁을 먹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우연히 연길시청사를 지나고 있는데, 주변 벽면에 적힌 단어들을 보니 중국 정부의 정책 기조를 읽을 수 있는 듯했다. 붉은 바탕에 하얀 글씨체로 한글과 한자를 병용해 쓴 6개의 원안에는 부강·민주, 문명·조화, 자유·평등, 공정·법치, 애국·열성, 성실·우애 등이었다. 백두산 북파에서도 목격한 단어였다.

 

▲ 이곳 중국인들은 아침이나 저녁 일정시간을 정해 스스로 나와 함께 춤을 춘다.     © 기자뉴스

 

이곳을 순식간에 지난 버스는 연길 주변 한식 식당 송림각(솔밥집)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모처럼 정통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한국의 음식보다 더 담백하고 맛이 좋았다. 특히 소주와 북한산 대동강맥주 맛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식당 디자인도 한국 전통음식점 못지않게 잘 꾸며져 있었다. 저녁 8시경 송림각(솔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연길 국제호텔로 향했다. 도착해 여장을 풀고, 샤워를 마친 후 내일 귀국을 위해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14일 아침 일어나 보니 오전 820분이었다. 잽싸게 호텔 뷔페에서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이후 호텔방에서 휴식을 취하다 오전 945분경 로비로 나왔고, 1010분경 버스를 타고 연길공항으로 향했다. 또 다시 한글과 한자로 병용해 쓴 다양한 가게 간판을 보며 우리민족인 조선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삼륜차도 많이 보였다. 121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연길공항 도착해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짐 수속을 마치고 출국심사를 받았다.

 

34일 간의 여정을 함께 했던 현지 가이드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항공기를 타기 위해 공항 내 게이트로 갔다. 탑승시간이 남아 40여 평 정도 된 작은 면세점을 둘러봤고, 의자에 앉아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방 보딩 타임이 됐다. 줄을 서 수속을 밞고 대한항공 비행기에 탑승했다. 2시간 30분 정도를 탔고 오후 345분 인천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았다. 공공연맹 공공부문 대표자 백두산 민족역사기행 34일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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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8/05 [11:36]  최종편집: ⓒ 인터넷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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