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 방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90년대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정다운 선배, 영면하소서
고 정용운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기자뉴스 김철관 기자 기사입력  2019/07/06 [11:46]
▲ 고 정용운 님의 영정사진     © 기자뉴스


고 정용운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사람의 인연, 만남과 헤어짐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난해 330일  나와의 두 살 터울인 철수형을 식도암으로 잃어 슬펐다. 지난 628일은 평소 존경했던 57년생 정용운 직장 선배가 소천을 해 마음을 아프게 했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이순(耳順)을 갓 넘긴 나이에 죽음이라니. 이렇게 허망할 수 있는 것일까.

 

지난 6월 중순 일본에 업무차 출장을 갔는데, 직장 후배에게서 휴대폰 메시지를 통해 긴급한 기별이 전해졌다. 몇 년 전 정년퇴직을 한, 1957년 정유년생인 정용운 선배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있는 고인의 형수님에게 기별을 했다. 잠시 위로를 하면서 선배의 상태를 여쭈었다. 곧바로 면회를 가겠다고 했더니, 지금은 와도 알아볼 수 없으니 회복이 되면 다녀가라고 했다. 그 말에 안도심이 생겼다. 차도가 있으면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기다렸다.

 

하지만 지난 627일 오후 병상에 누워있는 정 선배와의 절친이었던 이성범 선배가 정 선배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라며 나에게 보내왔다.

 

매우 위독해요. 오늘 낼 오셔요. 짧은 인사 나누셔요.”

 

미리 정해진 중요한 약속이 있어 다음날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를 하고 있는 그날(628) 이성범 선배에게서 또 하나의 문자가 왔다.

 

방금 정용운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억장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생전에 만나 작별인사도 못하고 영면했기 때문이었다. 즉시 후배에게 전화해 빈소에 조화를 보내라고 했다.

 

고인과의 인연은 내가 직장에 입사한 8812월부터 시작됐다. 함께 근무한 직장에서 그에게 사물놀이를 배웠고, ‘풍물패를 만들어 함께 활동을 했다. 특히 고인은 90년 초 직장 노조 사무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아내는 당시 민중노래패 꽃다지에서 활동하면서, 민중가요를 잘 불러 운동권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탄 분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결혼식을 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특히 그와 1990년경 몇 사람의 직장 동료들과 함께 대성리 유스호스텔로 여름캠핑을 갔던 기억들도 떠오른다. 당시 만해도 그는 눈이 동그랗고 양 눈썹이 진하고 얼굴 윤곽석이 선명한 미남형이었다.

 

▲ 지난 90년 초 남양주 대성리 유스호스텔에서 여름 캠핑을 가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 기자뉴스

 

자신의 주장이 강한 선배였지만 나에게만큼은 항상 다정다감하게 대해줬다. 고인은 노태우 군부독재 정권시절인 1989316일 직장 파업 당시 노동조합 간부로 활동하면서 나와 함께 풍물패 활동도 했다. 그는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도 됐다. 당시 그가 삭발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며, 한 손을 하늘로 추겨 세운 모습은 당시 운동권 집회 걸게 그림이나 민중잡지 삽화 등에서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다.

 

직장을 다닐 때는 간간히 소식도 전하고, 그의 소식을 듣고 했던 그가, 정년퇴직을 한 후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지난 6월 말, 비보가 전해지면서 고인에 대한 무심이 가슴을 찌르도록 아프게 했다.

 

지난 628일 늦은 밤 상례식장에 와 조의를 표하면서 헌화와 향불을 피웠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술 한잔을 건넸다. 환하게 웃고 있는 고인의 영정사진을 보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성범 선배를 비롯해 풍물패를 함께 했던 직장동료들이 늦게까지 술잔을 서로 건네며,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너무 고마운 분들이었다. 상주 역할을 한 고인의 두 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며, 풍물패 동료들과 함께 빈소를 나와야 했다.

 

 

지난 5일 고인의 아내 형수(미망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저의 남편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양지바른 곳에 잔디장으로 잘 모셨습니다. 직장의 선후배님들이 오셨는데 제가 연락처를 몰라 일일이 감사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답장을 쓸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답장을 못 쓰고 있다. 말로 위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이다.

 

  

선배님, 하늘나라에 먼저 가신 우리 가족 철수형을 찾아 안부전해 주시고, 그곳에서는 절대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고 정용운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 고 정용운 님의 영정사진     © 기자뉴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9/07/06 [11:46]  최종편집: ⓒ 인터넷기자협회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