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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리 무후 광복군 17위 '국립현충원' 이장해야"
광복 76주년 '8.15 광복절', 수유리 무후 광복군, 애국선열 묘소 등을 참배했습니다
 
기자뉴스 김철관 기자 기사입력  2021/08/16 [13:18]

 

▲ 수유리 무후 광복군 17위 합동묘지     © 기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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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광복 76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서울 강북구 수유리 애국선열의 묘소를 찾아 추모와 함께 애국을 다짐했다.

 

15 오후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사망 후, 78년 만에 고국(서울공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뉴스로 전해졌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SNS에 올린 카자흐스탄에서 타고 온 비행기 기내에서 들고 있는 홍범도 장군의 초상화를 보면서, 언뜻 지난해 4.15총선에 앞서 서울 노원구을에서 출마한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 의원과 인터뷰가 떠올랐다.

 

 “홍범도 장군은 제지공장 노동자, 군대 나팔수, 금강산 식객승, 백두산 호랑이를 잡는 포수였다.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라는 말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17일 이틀간 온오프라인으로 국민추모제가 진행되고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15일 오후 5시 광복 76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기억하기 위해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애국열사 묘소 순례에 나섰다. 이곳 수유리는 시민혁명 때 영면한 4.19민주묘지도 조성돼있지만, 독립운동을 했던 선열들의 묘소가 상당수 존재하고, 특히 무후 광복군의 묘소도 위치하고 있어,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기기에는 정말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수유리 북한산 둘레길과 함께 순국선열 애국지사 탐방로도 조성돼 있었다. 특히 수도권 코로나19 방역 4단계로 인해 모든 오프라인 8.15행사가 중단된 상태여서 혼자 갈수 있는 곳으로도 의미가 있어 보였다.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서 시내버스 1119번을 타고 종점이 도착해 아카데미 하우스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니, 북한산 둘레길이 나오고, 둘레길을 따라 먼저 찾는 곳이 무후(無後, 후손이 없는)광복군 합동묘소였다.

 

묘소 앞에 놓인 광복군 합동묘소 표지판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순국한 애국선열 17위의 합동묘소로 1976년 광복군동지회에서 조성 후, 1985년 국가보훈처에서 단장했고 2017년 강북구청에서 추모조형물을 건립했다고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광복군 합동묘소 표지판에는 애국선열 17위의 이름도 적시했다.

 

김성률(19439월 산서성 농천 전투에서 순국), 김순근(1945년 초모공작 중 체포돼 자결 순국), 김운백(19439월 태항산 전투에서 순국, 김유신(1943년 태항산 전투에서 순국), 김찬원(19458월 태원에서 순국), 문학준(19438월 하남성 수무현에서 순국, 백정현(19444월 태원에서 순국), 안일용(19435월 하남성 수무현에서 순국), 이한기(19437월 전방공작요원으로 활동) 이해순(19458월 하북성 석가장에서 순국), 전일묵(19458월 산서성 태원에서 순국), 정상섭(19439월 태항산 전투에서 순국), 현이평(19413월 서안에서 순국), 한휘(19437월 태항산 전투에서 순국, 동방석(1971년 사망, 태항산 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이도순(미상, 서산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조대균(미상, 특수공작훈련단으로 활동), 김천성(19457월 산서성 태원에서 순국), 한성수(19455월 광복군 모집 및 정보공작 중 순국) 19위이다.

 

애국선열 김천성 선생은 후손이 나타나 19758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했고, 애국선열 한성수 선생 또한 1991619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해 현재 수유리 광복군합동묘소에는 17위가 잠들어 있다. 이들 애국선열들은 20대로써 미혼일 때 전사해 후손이 없는 상태이다.

 

이곳 광복군 이름이 게재된 표지판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후, 먼저 광복군 합동묘소 앞에 서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렸고, 묵념으로 추모했다.

 

묘소 앞에는 황기철 보훈처장의 조화와 이곳 강북구 수유리가 지역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박용진이라고 쓴 조화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놓고 간 조화 다발도 보였다.

 

바로 옆 약수터에서는 맑은 샘물(약수)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목이 타 약수 한 사발을 마신 후, 약수터 벤치 의자에 앉아 카메라로 촬영한 무후 광복군 17위 선열들을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봤다. 독립을 보지 못하고 20대 청춘을, 대한독립에 불사른 선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정부 당국(국가보훈처)에서 돌볼 후손이 없어 국립묘지에 이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루 빨리 국립묘지로 이장하는데 앞장서야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무후 광복군 합동묘소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지만, 후손이 없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광복군 19위의 선열을 모신 합동묘소이다. 그중 후손이 나타난 두 분은 국립묘지로 이장했고, 현재 17위의 선열이 잠들어있다. 이들 대부분은 20대 미혼일 때 전사해 후손이 없다. 대한민국순국선열숭모회가 광복군 합동묘소에서 지난 2009년부터 현재까지 12년 째 추석차례 추모제를 이어오고 있다.

 

광복군 합동묘지를 등지고 3.1운동에 참여했고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단주 유림(旦洲 柳林, 1894~1961) 선생의 묘소로 향했다. 그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대표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단주 선생은 1945년 광복을 맞아 환국 기자회견을 통해 나의 이상은 강제 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밝혀, 아나키스트다운 독립운동가였다는 말이 실감났다. 특히 단주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손가락을 끊어 충국에국이란 혈서를 쓴 장본인이기도 했다.

 

바로 단주 선생 묘소 인근에 애국선열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1887. 12.15~1964.1.13.)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는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변호사로서 독립운동사건이나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민족지도자들의 무료 변론을 맡았고, 광복 후, 초대와 2대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그가 1963년에 밝힌 국가의 기본은 국민이요, 정치의 대상은 국민의 복리에 있다. 위정자는 근검절약을 국민에게 몸소 보여주지 못한다는 그의 어록은, 여야 당파 싸움만 일삼는 현 정치인들에게도 교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 주변에 있는 상해 임시정부 법무총장, 재무총장, 국무위원을 역임한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1869~1953) 선생의 묘소도 참배했다. 그가 임시정부 시절 이권으로 생각이 갈라져 있음을 통곡하며 밝힌 문관이 돈을 탐하지 않고, 무관이 죽기를 싫어하지 않으면 가히 천하를 회복할 수 있다라는 일화는 후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이시영 선생 가문은 육형제(회영, 건영, 석영, 철영, 호영)를 포함해 가족 59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형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과 가족들의 독립운동을 기린 이회영기념관이 지난 69일 서울 중구 남산에 문을 열기도 했다.

 

이시영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발해 사임했다. 그는 조선 마지막 영의정을 지냈고, 4번의 총리대신을 역임한 김홍집의 사위이기도 하다.

 

성재 선생 묘소를 등지고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의 묘소를 찾았다. 전 평리원 검사 일성 이준(一醒 李儁, 1859.1.21.~1907.7.14.) 열사는 조선 고종의 칙령을 받들고, 을사조약 무효와 자주독립을 위해 이상설(전 의정부 참찬), 이위종 열사(전 주아공사관 참서관)와 함께 밀사로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에 갔다가, 일본 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당시 이준 선생의 죽음을 접한 청나라 위안스카이(원세계)는 애도시를 통해 군왕에 보답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버렸도다, 대의는 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높다랗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준 열사는 생존에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라는 그의 어록은 지금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이준 선생 묘소로 가는 길 양편에는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꽃 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두 시간 정도 소요된 순례길이었는데, 무후 광복군 합동묘역에서 시간을 많이 할애한 관계로 이곳에 있는 여러 순국선열의 묘소를 참배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곳 수유리는 국권회복을 위해 비밀결사단체 활동을 한 동암 서상일 선생, 무정부주의 단체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한 현곡 양일동 선생, 을사오적을 처형하라고 상소하다 옥살이를 한 심산 김창숙 선생,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상산 김도연 선생,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한 강재 신숙 선생, 상해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출신인 혜공 신익희 선생과 한국광복군활동을 한 그의 아들 신하균 선생, 기독교인으로 독립선언서 33인 중 한 사람인 이명룡 선생 등의 묘소도 있다. 이곳은 많은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있어 수유리 애국열사 순례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15일 오후 광복 76주년 8.15 광복절, 서울공항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 도착 소식을 들으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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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8/16 [13:18]  최종편집: ⓒ 기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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